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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경북

[영천여행] 도계서원과 청제못

도계서원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 박인로(朴仁老, 1561~1642) 선생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 

박인로는 (호 노계蘆溪).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참가하여 무공을 세웠으며 이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또한 글재주가 뛰어나 <태평사(太平詞)>, <독락당(獨樂堂)>, <영남가(嶺南歌)> 등의 가사를 지었으며,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3년씩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심이 지극하였다. 

관직을 그만둔 뒤에는 낙향하여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두산백과


전국을 여행하다 보면 종택이나, 서원이란 이름으로 화려하기까지 한 고택들이 수없이 많다.

더구나 이들은 한결같이 경관이 수려하거나, 아름답고 멋들어진 곳에 호화롭고 웅장하게 지어져 있다.


이를 보면 긍금하기도 했던것이 서원이라면 마을이나 동리 가까운 곳에 지어져 

학생들이 자유롭고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했을텐데 물론 양반들 자식들 전유물 이였겠지만

왜 꼭 마을에서 멀고 후미진곳,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지어졌는가 하는것 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도 권력이나 큰 돈을 갖은 자들은 경치 좋고 , 멋들어진 곳에 

 의례 불법과 위법을 동원해 자신들만의 세계 별장이나 주거 건축물을 호화스럽게 짓는다


그 옛날에도 탐관오리는 물론 권력을 갖었거나, 갖었던자 들이 왕의 눈을 피하기 위해  

경치 좋은곳을 선점해 자신들의 별장을 서원이란 이름으로 건축 했던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러가지 이유갸 있겠지만 그러기에 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을 내렸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은 다음과 같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 양성과 선현 배향, 유교적 향촌 질서 유지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차츰 혈연·지연 관계나 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병폐도 많았다. 

그리하여 지방 양반들이 서원을 거점으로 백성들을 토색질하고 지방관청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설립이 제한되고 훼철을 명령받기도 하였다."..생략 인터넷 지식백과에서


물론 이곳은 본인이 지은것이 아니고 후대 유생들이 "노계 박 인로" 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는 한다


도계서원 앞의 연못같은 저수지 연대는 확실히 모르겠다



노계 박 인로를 기리는 비들




노계 문학관..노계 박인로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구비되 있다



박인로를 섹스피어와 비교한 전시물


그의 작품들



그리고 그의 삶의 발자취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저수지라는 청제못

신라시대에 축조 되었다 한다

안내판에 보이듯이 이곳은 보물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을 찿을려면 "청제못" 보다는 "청제비"라 찍어야 네비가 잘 인식한다


바로 이곳 

이 청제저수지를 언제, 어떻게 축조 했다는 기록이 적인 비석 "청제비"를 보관한 전각이다




물론 후대에 여러모로 규모가 커졌을지 모르나 지금의 중장비로도 꽤나 시간이 걸렸을 규모..

당시에는 순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건설했을 테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경이롭기까지 하다